대한민국 가장 깊은 기차역, 분천으로의 초대
경북 봉화군의 분천역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기차역’으로 불린다. 행정구역상으로도 거의 최북단에 속하고, 인근에 인가라고는 몇 가구의 산촌 마을이 전부다. 그런데 이 작고 외로운 역이 최근 몇 년 사이 여행자들에게 조용히 회자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달리는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 때문이다. V자 형태로 깊게 파인 계곡을 따라 달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분천~철암 구간, 왕복 약 27.7km의 짧은 거리이지만 그 안에 담긴 풍경은 결코 짧지 않다.
분천역은 한국철도공사에서 가장 ‘느리고 정적인’ 기차역 중 하나로, 기차가 하루에 몇 번밖에 오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역 자체가 하나의 관광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옛 간이역 구조를 유지한 이 역은 2013년부터 ‘산타마을’로 운영되며 사계절 내내 작은 전시물과 조형물, 그리고 지역 농산물 장터가 꾸려진다. 눈 내리는 겨울에는 실제로 ‘산타’가 등장하는 이벤트가 진행되기도 하며,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동심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분천역의 진짜 매력은 플랫폼 너머, 백두대간의 산과 협곡이 어우러진 깊은 풍경 속 철길이다. 이곳은 도로도, 고속도로도 닿지 않는 그야말로 ‘철로로만 접근 가능한 오지’다. 협곡과 산자락이 끝없이 펼쳐지고, 좁은 철길이 그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풍경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다. 기차가 플랫폼에 천천히 들어올 때마다, 누군가는 추억을 꺼내 들고, 누군가는 새로운 기억을 싣는다.
백두대간 협곡열차, 풍경이 창 밖에 붙는 기차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일반적인 KTX나 새마을호처럼 빠르거나 조용하지 않다. 이 열차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천천히 달리며, 창 밖의 풍경을 여행자의 눈앞으로 끌어당긴다. 시속 30~50km로 달리는 기차는 마치 구불구불한 옛 고무줄 기차를 연상케 하며, 강과 바위, 터널과 철교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스쳐 지나간다. 기차는 총 4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객차 내부는 나무 의자, 벽화, 지역 특산품 홍보존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이 열차의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은 열차가 댐과 강 사이 협곡을 천천히 빠져나갈 때다. 철로 아래로는 낙동강 지류가 흘러가고, 위로는 백두대간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한쪽은 물길, 한쪽은 산길. 양면의 자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기차라는 점에서 이 열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이동형 전망대라 할 수 있다. 특히 가을이면 단풍이 산허리를 휘감아 마치 기차가 단풍 속을 파고드는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기차는 중간에 몇몇 정차역에서 잠시 멈추기도 한다. 승객들은 짧은 시간 동안 역 근처를 거닐거나 사진을 찍는다. 마치 한 편의 슬로우 모션 여행 같다. 풍경이 말을 걸어오고, 기차가 그 대답을 대신해 주는 듯한 착각. 소음 하나 없이 달리는 그 리듬이 자연과 여행자의 호흡을 일치시켜준다. 협곡의 계절마다 달라지는 색감, 물안개가 퍼지는 새벽, 눈이 쌓이는 겨울의 고요함까지,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사계절이 그대로 살아 있는 기차다.
철로 따라 이어지는 트레킹, 분천역을 걷다
분천역 주변은 단순히 기차만 타는 장소가 아니다. 이곳에서 출발하거나 도착한 여행자 중 상당수는 철로를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를 함께 즐긴다. 기차를 타기 전, 혹은 하차 후 걷기 좋은 구간으로는 분천역~승부역까지의 철길 산책이 있다. 옛 철로를 따라 만든 숲길과 나무데크, 그리고 낙동강 지류가 이어져 있어 자연스럽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총 길이는 약 3~4km 내외로 짧지만, 해발 800m 고지대 특유의 맑은 공기와 조용함이 이 길의 정수를 만든다.
분천역은 산간 마을답게 간단한 간식 외에 상업시설이 거의 없고, 숙소나 식당도 많지 않다. 때문에 이곳을 여행하려면 간단한 도시락과 물, 그리고 느긋한 마음을 준비해 오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이 있어야만 이 오지는 오지답다. 트레킹 도중엔 멀리서 협곡열차가 터널을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낙동강을 따라 흐르는 작은 물줄기 소리가 트레킹의 배경음처럼 흐른다. 사람보다 자연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트레킹 코스 외에도 분천역 내부에는 산타마을 테마관, 기념품 가게, 포토존 등이 마련되어 있다.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겨울이면 산타 복장을 한 직원들과 썰매 체험 등 작은 이벤트가 펼쳐져 어린이 가족 여행객에게도 좋다. 그러나 진짜 이곳을 찾는 이유는, 도시의 소란에서 멀어지는 느낌일 것이다. 오지 철길을 걷는 기분은 단순한 운동을 넘어서, 마치 자신만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느린 입장권’을 받은 듯한 기분을 준다.
자연과 연결되는 슬로우 트래블의 진수
분천역과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이동의 목적이 아니라 머무름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이다. 현대인의 삶은 빠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여행도 빠르고, 일정도 빽빽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느려야만 가능하다. 기차는 느리게 오고, 사람은 천천히 걷고, 풍경은 한없이 넓다. 그래서 이 오지의 시간은 짧게는 하루, 길게는 마음속에서 한참 동안 이어진다.
무엇보다 이곳이 가진 가장 큰 가치는 ‘자연과의 연결’이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척추라고 불리는 산맥이며, 이 열차는 그 척추에 기대어 달린다. 우리나라 산맥의 중심부에서, 사람의 손보다 자연의 흐름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곳. 협곡은 자연이 스스로 깎아낸 조형물이고, 그 사이를 기차가 조용히 스쳐간다. 인간은 이 풍경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자연의 이야기를 듣는다.
여행은 때로 고요해야 깊어진다. 말이 줄고, 속도가 느려질수록 진짜 내면의 소리가 들려온다. 분천역과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바로 그런 ‘느림의 미학’을 가진 곳이다. 진짜 여행을 원한다면,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 전에 이 오지의 철길을 먼저 걸어보라. 철로 위를 달리는 그 천천한 리듬이, 당신의 삶을 더 깊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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